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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성, 동국대학교 영상학과 재학

 

 

“언제부터 영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저는 영상물로부터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16살 때였을 거에요. 북한에 있을 때부터 막연히 영상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중간에 학교를 나갈 수 없게 됐어요. 아버지가 먼저 한국으로 가셨거든요. 아버지가 실종되시고 소문이 안 좋게 나서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어요. 심지어 그 때 학생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학교에 가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집에서 놀기만 했어요. 2년 정도 집에서 영상만 계속 봤어요. 한국, 미국, 러시아 영화와 드라마였어요. 영화를 보면서 대사를 따라 해 보기도 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께 보여 드리기도 했죠.

 

“영화를 보면서 어떤 걸 따라 하신 건가요?”

“말하기는 쑥스럽네요. 영화 대사 같은 것이었어요. “애기야 가자!” 같은 것이나, 천국의 계단에서 “사랑은 돌아오는거야!” 권상우처럼 말했죠. 그렇지만 드라마를 본 친구들만 알아 듣고 웃어요.”

 

“그래서 영상학과에 진학하게 되신 건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원서를 쓸 때, 어머니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 기차 타는 것을 좋아했다면서, 철도대학교를 가라고 하셨어요. 이미 접수도 하시고 면접 날짜도 나온 상태였어요. 그런데 제가 면접 날짜에 면접을 간다고 하고 안 갔어요.
 PC방에 앉아서 동국대학교 영화학과랑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썼어요. 저는 영상이랑 연기 둘 다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저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중앙대학교 면접을 보러 갔는데 보여줄 수 있는 연기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북한 사투리를 했어요. “저는 북한 사투리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북한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말하고 정말 할 수 있는 것을 했어요. 그런데 면접관이 나가라고 했어요. 떨어졌죠. 사람들은 요즘 북한 사투리라고 하면 영화에 나오는 평양 사투리에 길들여져 있어요. 함경도 사투리는 약간 조선족 분들처럼 들리나 봐요. 조선족 느낌이 난다고 하면서 떨어뜨렸어요. 동국대학교는 북한 사람들을 위한 외국인 전형이 있었어요. 동국대학교는 면접을 보고 합격했어요. 더 준비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와 갈등이 좀 생겨서 그냥 갈 수 있었던 동국대학교로 왔어요.”

 

“북한 사투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한국에 오자 마자 한국식 억양을 잘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제가 언어적으로 굉장히 교정이 됐던 건 학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한겨레 학교에 있었을 때는 친구들이 말하는 것 중 80%정도가 북한 사투리였어요. 저는 그 곳에 있다가 중간에 전학해서 일반 학교에 진학했어요. 2009년 정도에는 사회가 탈북민을 보는 시선이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학교를 다니면서 북한이 고향이라는 것을 숨겼어요. 제가 나름의비밀을 하나 가지고 있으니까, 최대한 말을 적게 하면서 비슷하게 하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한 것 같아요. 다른 친구들은 야간자율학습을 할 때 저는 전자사전에 드라마를 넣어 보면서 한국 말투를 듣고 따라하는 연습을 했어요. 나도 모르게 내 신분을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제가 북한 사투리를 하지 않게 된 것 같아요. 사실 북한 사투리는 이제 불가능한 것 같아요.”

 

“제작하신 영화를 봤어요. 본인의 경험을 담은 영화인가요?”

“고등학교 때 사투리는 완전 벗었고, 한국도 이제는 잘 안다고 생각해서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제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숨겼어요. 그런데 학교 다니고 한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 학생증을 수령하러 갈 때였어요. 수령 사인을 하는 리스트에 학생들의 이름과 함께 입학 전형이 적혀 있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정시, 수시 같은 것이 적혀 있었고, 제 이름 옆에는 북한이탈주민 전형이 적혀 있었죠. 너무 황당했어요. 숨겨야 하는 나만의 비밀이었는데 이렇게 공개가 되어 버렸고, 모든 동기가 사인을 하면서 그것을 다 보게 될 테니까요. 그래도 다행인 건 제 앞에 사인한 친구가 세 명 정도였다는 거에요. 제 이름 옆의 전형을 지우고 사인하고는 그 학생 세 명을 찾아가 일일이 다 만났어요. “너 혹시 나에 대해 아니?” 물어 보니, 두 명은 몰랐고 한 명은 안다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는 제게 “너 고향이 거기더라.” 말했어요. 그런데 저는 그걸 별로 밝히고 싶지 않으니 모른 척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모두 알고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알려지더라고요. 그런데 결정적인 계기는 하나 있었어요. 제가 1학년 때 자주 입는 옷이 있었어요. 차이나 카라 코트에 북한 간첩들이 쓰는 것 같은 캡이었어요. 아는 형이 졸업영화를 찍을 때 제가 촬영부로 갔는데, 그 형이 저를 보자마자 “북한 간첩이야?” 라고 장난 식으로 물어봤어요. 제가 너무나도 한국스러우니까 전혀 몰랐겠죠. 그런데 저는 그걸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저 북한에서 왔는데 왜요?”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어요. 형은 “야 이 새끼야 선배한테 장난쳐?”라고 하면서 언성이 높아져서, 저도 “저는 솔직하게 이야기한 건데 왜 그러세요?” 라고 화를 내며 나갔어요. 형은 다른 친구들한테 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사과했어요. 정말 북한에서 왔냐고, 미안하다고요. 그 다음부터는 저도 공개적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래도 방송과 같은 매체에 나와 말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재작년에 제가 선교를 위해서 1년 정도 미국 전역을 돌다 왔어요. 다니면서 했던 테스티모니라고, 미국 아테나 쪽에서 하는 활동이 있었어요. 연단 앞에서 제가 “I am from Korea.”라고 말했더니 사람들이 편하게 “North or South?” 물어보는 거예요. 제가 몇 번은 south라고 하다가, 거짓말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I’m from North Korea.”라고 대답했더니, 아무 감흥도 없더라고요. ‘그게 뭐 어째서?’ 같은 느낌으로요. ‘그래, 이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알게 되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모든 사람들에게 100퍼센트 공개하게 됐어요, 방송에 나와서도 잘 이야기했어요. 아무런 선입견 없이 바라봐 주는 외국의 시선이 참 좋아서, 그게 하나의 계기가 되었어요. 그 사람들은 뉴욕이나 텍사스와 같은 떨어진 곳이겠거니 생각하는 거잖아요?”

 

“나중에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으세요?”

“저와 제 곁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정말 풍부해요. 알릴 가치가 있는 이야기들이에요. 그리고 영상은 그 이야기를 담아내는 도구에요. 영상으로 내가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해요.
 얼마 전에 남한에서 생활하는 친구들 두 명, 그리고 저랑 북한 친구 두 명, 이렇게 남북 청년 네 명이 두만강부터 태국까지 이어지는 만 리의 여정을 다녀왔어요. 제가 탈북했을 때처럼 3국과 그 경로를 그대로 거쳐오면서 다큐멘터리를 찍었어요.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탈북민에 대한 시선을 바꾸고, 북한 사람들의 경험을 전달하는 영상을 만드는 것이요.”

 

“그 여행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어요.”

“탈북 경로는 굉장히 많아요. 3만 명이 왔으니 3만 경로가 있었을 거에요. 그래도 대부분은 중국을 거쳐서 라오스나 미얀마에 갔다가 태국에 들어가서 거기서 이민 인정을 받고 한국으로 와요. 그 기간은 다 달라요. 저는 7개월 정도가 걸렸어요. 제 탈북 이야기를 친구들이 듣고는, “우리도 경험해보고 싶어.”라고 말해서, “그럼 가자!” 해서 여행 계획을 짰어요. 총 여행기간은 3주였고, 중국 두만강부터 출발해서, 베이징, 연길, 곤명, 라오스, 여러 도시를 거쳐 태국으로 넘어왔어요. 방콕 이민국을 마지막으로 영상을 끝냈어요.
 지금까지 있었던 북한에 대한 영상들은 대개 굉장히 무거워요. 저희 여행의 주제는 하나였어요. 무조건 유쾌하게 가는 것. 저는 기회가 되면 계속 이런 영상을 할 것 같아요. 북한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됐든, 쇼가 됐든 말이에요.”

 


 북한에서 한국으로 온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아직 냉담한 차별이 존재하는 만큼, 그들은 자신의 고향이 어느 곳인지 선뜻 밝히지 못 한다. 그러나 그 바람 속에서도 자아는 움트고, 유성 씨도 많은 고찰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다시 규정하고 확인했다.
 자신만의 길을 찾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조건을 잘 활용하는 것 또한 힘들다. 우연처럼 영상을 접해, 영상 안에 자신의 가치관을 담는 능력을 보여 준 박유성씨로부터 우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열정을 배운다. 유성 씨가 만드는 영상은 그 누구의 것보다도 진실하고 솔직하며, 그래서 앞으로 그가 만들어 갈 작품들이 그의 바람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전할 것이라고 믿는다.

 

백윤하 에디터

한반도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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